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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지리학

도시의 역사

by 아임나무 2022. 9. 29.

고대 도시의 성립

 고대 도시의 정의에 부합되는 도시의 출현은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35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인류의 역사에서 최초의 정착 주거 형태는 곡물의 경작과 함께 나타났으며 도시적 취락은 잉여 식량이 충분히 확보되면서 발생한 것이다. 식량 생산에 있어 최초의 성공적 경험은 서남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한 퍼타일 크레슨트 지대에서 얻을 수 있다. 이 지대는 현재의 이라크에서 시리아와 레바논을 거쳐 이스라엘과 이집트에 이르는 초승달 모양의 비교적 비옥한 지역이므로 간혹 '비옥한 초승달'로 번역하여 사용하지만, 이것은 지명을 뜻하는 고유명사에 해당하므로 원문 그대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퍼타일 크레슨트 지대에서 인류 최초의 도시가 등장한 것은 이곳이 구대륙의 지리적 중심부에 해당하는 곳이며, 아프리카유〮럽아〮시아의 문화가 교차하는 접근성이 양호한 곳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농업혁명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에서도 일어났으며, 아메리카의 신대륙에서도 독자적으로 발생했다. 농업혁명은 인류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는데 알맞도록 기술의 적용을 자극함으로써 일어난 것이다. 특히 퍼타일 크레슨트 지대는 주변 지역에 비해 수목이 잘 생장하는 비옥한 지역인 까닭에 잉여 생산이 빠른 시기에 달성될 수 있었다. 이 일대의 주민들은 기원전 8000년경에 그들이 채집하고 사냥하던 동식물의 서식 범위를 잘 알게 되어 점차 작물화 가축화를 시작했다. 그들은 겨울과 봄에 흡족히 내리는 비를 이용하여 밀-보리 등의 화본과 식물 뿐 아니라 개양〮염〮소돼〮지소〮말〮낙〮타 등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축적했다. 일반적으로 가축화는 습윤 지역보다 건조지역의 주민들이 그 필요성을 더 느낀다. 왜냐하면 건조지역일수록 미생물의 부족으로 유기질 분해 속도가 느려 지력의 회복이 늦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천~8천 년 전에 지구상에 커다란 기후변동이 있었다. 특히 사하라 일대가 사막화됨에 따라 이 지역의 정착민들은 대하천 주변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들은 받아들인 하천 유역의 기존 주민들은 식량 증산을 위해 관개 기술을 개발하거나 유입민을 노에화하여 잉여식량의 창출을 꾀했다.

 퍼타일 크레슨트 지대의 농업혁명은 잉여 식량을 낳았고 이를 바탕으로 고대 도시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인류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계획적인 식량소비나 파종할 종자의 비축 등과 같은 지적(intellectual) 계획이 필요함에 따라 논리적 사고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서 과학기술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인구가 집단적으로 모여 살게 되면 문화 수준이 향상되어 문명을 발달시키기 마련이다. 뒤를 이어 인류 문화는 인더스강 유역- 황하 유역-중앙아메리카에서도 꽃을 피웠다. 여기서 우리는 중앙아메리카를 제외하고 고대 도시의 발생지가 고대 문명의 발상지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인류의 문명이 도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한다.

중세 도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에 후진 식민 지역이었던 유럽이 중세에는 현대 문명 창출의 선두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중세 유럽은 문화적경〮제적 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점차 혁신과 성장의 핵심지가 서남아시아와 지중해에서 유럽의 내륙으로 옮겨갔다. 예술과 과학, 문학과 고딕 건축 양식에서 진보가 이루어졌고, 이들 발전에서 기독교가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유럽에서 이와 같은 변화는 중세의 수 세기에 걸쳐 진행되었고, 로마 제국의 몰락과 그 뒤에 잇달아 여러 차례 계속된 게르만족의 침입에 따라 정치 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질서를 전개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많은 독립 왕국이 성쇠를 거듭했다. 우리는 여전히 앵글로색슨족과 잉글랜드, 프랑크족과 프랑스독〮일, 그리고 500년경에 이탈리아를 정복한 게르만계의 일족인 롬바르도족과 이탈리아를 각각 연관 짓는다. 프랑크족에서는 717년에 권좌에 오른 샤를마뉴 대제가 나왔다. 그는 광대한 기독교 제국으로서 서유럽 문명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서로마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제국은 분열되어 수많은 소국 또는 왕국들이 재등장하게 되었다. 800년경에는 혼란을 가속화시키는 일련의 침략들이 다시 유럽을 강타했다. 북쪽의 바이킹족, 동쪽의 마자르족(Magyars: 헝가리), 남쪽의 사라센족이 해안과 평야 및 강 유역을 약탈했던 것이다(Hartshorn, 1992).

 지방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벽으로 둘러싼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이와 같은 진행은 이러한 내란의 시대에 중앙 권력이 소멸하고 지방의 자급 자족적 성격이 강화되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이는 봉건제(feudalism)를 낳았다. 궁극적으로 봉건제는 영주와 가신들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었다. 무력을 가진 강자들은 보호할 왕실(정치단체)을 운영했다. 지역적 범위와 통제력에 있어서 매우 다양하기는 했지만 봉건제는 서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지배적인 통치 구조가 되었고, 그보다는 정도가 약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시행되었다. 전형적인 봉건 국가의 규모는 오늘날 미국의 카운티(county) 정도의 크기였다. 봉건제가 절정에 다다른 것은 900년에서 1100년까지였다. 디 상시의 세계 주요 도시들은 현재의 서남아시아(바그다드와 콘스탄티노플)나 동아시아(장안, 항저우)에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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